[청대소설사] 명청 교체기의 소설(4) – 영웅전기소설

제3절 《수호후전(水滸後傳)》과 영웅전기소설

영웅전기소설은 사실상 역사 연의체 소설의 한 갈래에 해당했다. 노신(盧迅)의 《중국소설사략(中國小說史略)》에서는 이를 ‘강사(講史)’에 포함시키며, “한 시대의 이야기를 서술하되, 특히 한 사람 또는 몇몇 인물에 중점을 두는 것”이라 정의했다. 이러한 유형의 소설은 역사 연의와 마찬가지로 그 기원을 송·원대의 설화(說話)에서 찾을 수 있었으며, 그 시초는 바로 《수호전(水滸傳)》이었다. 명대에 이르러 사람들은 《수호전(水滸傳)》을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와 나란히 놓고 연의체로 간주했다. 그러나 청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수호전(水滸傳)》의 전기적 특성을 지적하는 견해가 나타났다. 예를 들어 유수(鈕琇)의 《고잉속편(觚剩續編)》 권1에서는 이를 전기연의(傳奇演義)라 하였고, 왕사정(王士禛)의 《향조필기(香祖筆記)》 권12에서는 야사전기(野史傳奇)라 불렀다. 청 말 작자 미상의 《중국소설대가 시내암전(中國小說大家 施耐庵傳)》에서는 이를 영웅소설이라 하였다. 그중에서도 유수(鈕琇)의 해석이 특히 상세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기연의란, 본래 시가나 인물 전기를 바탕으로 하되, 그것이 변화하여 대중적으로 읽히는 형태가 된 것이었다. 내용은 애절하거나 화려하고, 기이하며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지녔고, 각각 그 방면에 능한 작가들이 있었다. 그 글은 마치 놀이하듯 가볍고 흥미롭게 쓰인 경우가 많았다. 대체로 상상해서 꾸며낸 이야기로, 이름을 빌려 허구를 펼친 것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근거가 있다. 예컨대 《수호전(水滸傳)》의 삼십육 천강성(天罡星)은 공성(龔聖)이 지은 삼십육 찬(讚)에 근거한 것이다. 단지 척팔퇴 유당(尺八腿 劉唐)을 적발귀(赤髮鬼)로, 철천왕 초개(鐵天王 晁蓋)를 탁탑천왕(托塔天王)으로 바꾸는 등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논의는 전기연의의 기원, 양식, 소재의 특성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설명한 사례로 주목할 만했다. 영웅전기를 역사 연의와 명확히 구분한 인물은 근대의 정진탁(鄭振鐸)이다. 그의 저서 《삽도본중국문학사(插圖本中國文學史)》에서는 ‘강사와 영웅전기’라는 장을 별도로 두어 이 두 갈래를 상세히 설명했다. 두 장르의 주요 차이점은 다음 세 가지였다.

첫째, 창작의 주제 의식에서 차이가 뚜렷했다. 역사 연의는 사서(史書)를 바탕으로 하여 역사적 사건을 연출하고, 시대의 흥망과 변천을 서술하며,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 데 중점을 두었다. 반면 영웅전기는 특정 인물의 전기적 행적과 무예, 용맹을 부각하고, 특정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하며, 작가의 감정과 이상을 투영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둘째, 소재 선택 방식에서도 큰 차이가 있었다. 역사 연의는 실제 사건과 인물을 바탕으로 하되, 창작은 역사적 사실에 어느 정도 제약을 받았다. 이에 비해 영웅전기는 민간 설화를 중심으로, 인물과 사건이 역사적 흔적을 지닐 수는 있지만 대부분은 작가의 상상에서 나왔고, 역사에 구속받지 않았다.

셋째, 예술적 형식 면에서도 구분되었다. 역사 연의는 주로 편년체로 쓰여 한 왕조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서술하거나 고금의 사건을 아울러 전개하였다. 인물 또한 제왕(帝王)이나 장상(將相) 중심이었다. 반면 영웅전기는 기전체를 따르며, 민간의 호걸이나 이인(異人)을 중심으로,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인물상을 구축했다. 이야기의 중심은 하나의 영웅 혹은 영웅 집단이며, 이들을 중심으로 사건을 전개하는 것이 기본 구조였다.

결론적으로, 역사 연의에 비해 영웅전기소설은 문학적 성격이 더욱 강하며, 고대 중국 소설의 민족적 특색을 잘 드러내어 민중에게 깊이 사랑받은 대표적 장르로 자리 잡았다.

(1) 명청 교체기의 영웅전기소설 종류

명말청초에 등장한 영웅전기소설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은 세 편으로, 바로 《수호전(水滸傳)》 김성탄(金聖歎) 평점 개작본, 《후수호전(後水滸傳)》, 《수호후전(水滸後傳)》이다. 김성탄 평점본 《수호전》은 용여당(容與堂) 백회본 중 앞의 70회를 가려 뽑아 수정하고 평어를 덧붙여 만든 것이다. 《후수호전》은 남송 초의 양요(楊幺)가 의를 모아 폭정에 저항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두 작품은 《수호전》 전반부의 사상적 내용을 보존하거나 계승하면서도, 강한 호협 영웅의 전기적 색채를 지녔다.

이에 비해 《수호후전》은 양산박에서 살아남은 영웅 이준(李俊) 등이 다시 봉기하여 간신을 징벌하고 금나라에 맞서 싸우며, 마침내 해외로 건너가 다시 대업을 이룬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은 《수호전》이 내포한 충의보국(忠義報國)의 정신을 특히 두드러지게 계승하고 있으며, 사상적 성향이 더욱 뚜렷했다. 체제 면에서 보자면, 이 세 작품은 다음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1. 원작을 평점·개작한 유형

여기에서 주로 언급할 작품은 김성탄(金聖歎)의 평점본 《수호전(水滸傳)》이다. 김성탄은 본명이 채(采), 자는 성탄(聖歎)이며, 명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이름을 인서(人瑞)로 바꾸었다. 그는 명 만력 36년(1608)에 강소(江蘇) 오현(吳縣)에서 태어나 청 순치 18년(1661)에 사망했다. 젊은 시절부터 재명(才名)이 높았으며, 청에 들어가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성격은 괴팍하고 오만했다.

그는 《장자(莊子)》, 《이소(離騷)》, 《사기(史記)》, ‘두시(杜詩)’, 《수호전(水滸傳)》, 《서상기(西廂記)》를 묶어 ‘육재자서(六才子書)’라 칭했다. 이 가운데 특히 《수호전》에 대한 평점으로 유명했다. 그의 평점본 《수호전》의 정식 명칭은 《제오재자서 시내암 수호전(第五才子書施耐庵水滸傳)》으로, 명 숭정 14년(1641)에 간행됐다. 그는 《수호전》을 70회로 축약하면서, 초안(招安) 이후의 내용을 삭제하고 문장을 수정하고 평어를 더했다.

그의 평점은 종종 시사 문제를 비판하거나 시대의 정세에 대해 논평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한편으로는 ‘조정을 거역하고 난을 일으킨(犯上作亂)’ 걸 비난하며 양산박의 봉기를 부정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민중의 고통에 동정심을 보이며, 이는 관이 백성을 억압한 결과로 ‘난은 위에서 비롯된 것(亂自上作)’이라 평했다. 그는 《수호전》을 ‘원한이 서린 책(怨毒著書)’, ‘서민의 여론(庶人之議)’이라 보았다.

그의 작품 분석 가운데는 예리하고 깊이 있는 통찰이 적지 않아, 후대의 소설 이론과 비평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풍진란(馮鎮峦)은 《독요재잡설(讀聊齋雜說)》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김인서(金人瑞)가 《수호전》과 《서상기》에 붙인 평은 마음이 섬세하고 말솜씨가 뛰어나서, 후세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고 문학에 대한 감수성과 이해를 깊게 해주었다.”

이렇게 김성탄의 70회본은 이후 《수호전》의 가장 널리 읽히는 통용본이 되어, 광범위하게 유행했다.

2. 전작을 이어 쓴 유형

여기에는 《후수호전(後水滸傳)》과 《수호후전(水滸後傳)》이라는 두 편의 《수호전》 후속 작품이 포함된다. 이 두 작품 모두 송대 정강지변(靖康之變)을 배경으로 하여 역사적 사건을 빌미 삼아 현실의 정세를 풍자하며, 기존의 《수호전》을 보완하고 확장하려는 소설 가운데 독특한 면모를 보이는 대표작이었다. 이 절에서는 먼저 《후수호전》을 소개하고자 한다.

《후수호전》은 전10권 45회로 구성되어 있으며, 표제에는 “신간 시내암 선생 장본 후수호전(新鐫施耐庵先生藏本後水滸傳)”이라 되어 있고, 편자는 “청련실주인(青蓮室主人)”이라 적혀 있다. 권두에는 서문이 있으며, 말미에는 “채홍교상객(采虹橋上客)이 천화장(天花藏)에서 쓰다”라고 되어 있다. 이 청련실 주인은 실명이 전해지지 않으며, 서문을 쓴 천화장 주인과 동일 인물일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는 명말에 태어나 청 순치에서 강희 초에 걸쳐 활약한 인물로, 소설을 편찬하거나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아마도 순치 연간에 저술되었으며, 그 속의 “시내암 선생 장본”이란 표기는 사실상 위조된 이름으로 추정된다.

이 소설은 《수호전》 전편 이후의 이야기를 잇는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양산박의 영웅들은 조정을 받아들인 뒤 대부분 음모에 휘말려 희생당한다. 이에 송강(宋江)과 노준의(盧俊義)는 농가의 쌍둥이 형제로 환생해 양요(楊幺)와 왕마(王摩)로 다시 태어나고, 오용(吳用)은 하능(何能)으로, 이규(李逵)는 마약(馬躍)으로 환생한다. 남송 초 금나라 군이 침입하고, 고종(高宗)은 강남에 안주하며 정사를 돌보지 않자, 조정은 부패하고 전란이 잦아졌다. 이에 양요와 왕마는 하능, 마약 등 36인을 규합하여 동정호(洞庭湖) 군산(君山)에서 의를 모으고 부자를 노략질하며 빈민을 도우며 관군에 맞선다. 그들의 기세는 드높았고 어디서든 적을 이기며 명성을 떨친다. 조정은 크게 놀라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 악비(岳飛)를 보낸다. 양요 등은 전투에서 패하여 지하통로로 도망친다. 이후 영웅들은 다시 모여 “뼈와 껍질을 벗어던지고”, “검은 기운으로 변해 한 덩어리로 뭉치더니 다시는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그려진다. 소설은 송나라 역사에서 송강과 양요의 두 차례 봉기를 “하늘의 도리는 순환한다(天道循環)”는 논리로 연결하며, 농민 봉기가 끊임없이 이어졌던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구성은 기묘하며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작품에서 양요의 형상은 특히 의미심장하다. 그는 의군의 수장으로서 한편으로는 송강의 ‘의로움을 지키며 재물을 아끼지 않는’ 점을 배우고자 한다. 하지만 동시에 송강의 ‘우유부단하고 주관이 없어 형제들을 끌어들이고, 결국 음모에 빠져 희생된’ 점은 배우려 하지 않는다. 이는 작가가 송강의 조정 귀순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 것이며, 《수호전》의 반항 주제를 한층 더 깊이 있게 전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동시에 양요는 송강과 마찬가지로 충군 사상을 지니고 있다. 그는 임안(臨安)에 잠입하여 황제에게 직접 간언하며 “간신을 멀리하고 현자를 가까이하며 능력 있는 인물을 등용해 송 황실을 회복하라”고 조언한다. 그는 자신이 송나라의 “훌륭한 신하”가 되기를 원하며 “간신을 처단하고 아첨하는 자를 제거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다. 이런 묘사들은 나라를 잃은 데 대한 작가의 슬픔과, 언젠가 나라를 다시 일으키고 싶다는 바람을 담고 있다.

채홍교 상객은 서문에서 한편으로는 “나라의 운명이 이미 기울었고, 마치 사람의 반신처럼 기혈이 말라 시든 나무처럼 쇠약해졌다”고 슬퍼하며, 또 한편으로는 “임금에게 덕이 없어 양요(楊幺)와 같은 충성스럽고 의로운 인물을 중용하지 못한다”고 한탄했다. 그리고 “만약 그런 인물들에게 나라를 되찾는 일을 맡겼더라면, 연운(燕雲) 지역을 손쉽게 회복했을 것이며, 그 공로는 어찌 무목(武穆, 악비)보다 못하겠는가”라고도 감회를 밝혔다.

어떤 평자들은 이 작가가 “여진족이 흥했다 해도 송나라는 반드시 망하지는 않고, 비록 나라가 기울었어도 충신들은 여전히 굳건히 남아 있다”는 굳은 충성심을 품고 있었다고 본다. 그는 나라가 적에게 넘어가고도 이를 구할 사람이 없는 현실을 탄식하며, 송나라의 조구(趙構) 이야기를 빌려 사실은 명나라 숭정제의 멸망을 애도하려 한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해석은 충분히 타당하다.

《후수호전(後水滸傳)》은 예술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전작을 지나치게 모방하였으며, 마치 정해진 곡에 가사를 억지로 끼워 넣듯 창조적인 면모는 부족했다. 그러나 인물 묘사는 간결하고 명쾌하며, 문체 또한 거칠고 힘이 있어 나름의 개성이 있었다. 예를 들어 마살(馬薩)의 무모하면서도 솔직한 성격, 거칠고 교양 없는 행동 등은 비교적 뚜렷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유정기(劉廷玑)는 이 작품을 두고 《재원잡지(在園雜誌)》 권3에서 “온통 음란하고 불경한 말들로 가득하며, 문장은 뒤틀리고 엉성하여 개꼬리만도 못하다”고 혹평하였는데, 이는 지나치게 편파적인 비판이라 할 수 있다.

(2) 명청 교체기 영웅전기소설의 대표작

여러 편의 《수호전》 후속작 가운데, 사상적 가치와 예술적 성취 면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은 《수호후전(水滸後傳)》이다. 이 작품은 영웅전기 계열 소설 가운데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수호후전》은 원래 8권 40회본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건륭 35년(1770)에 채원방(蔡元放)이 이를 10권으로 나누어 간행하면서, 회차 제목과 문장을 일부 수정하였고, 이 판본이 후세에 널리 유통되었다. 책의 저자 명의는 “고송유민(古宋遺民) 지음, 안탕산초(雁宕山樵) 평”이라 되어 있다. 고송유민은 바로 진침(陳忱)으로, 자는 하심(遐心), 또 다른 자는 경부(敬夫), 호는 안탕산초(雁宕山樵)였다.

그는 명 만력 41년(1613)에 절강(浙江) 오정(烏程)에서 태어났으며, 사망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청 강희 9년(1670)에 세상을 떠났다는 설이 있다. 그는 중년 무렵 명청 교체의 격변기를 맞았다. 명나라가 멸망한 후에는 벼슬할 뜻을 완전히 접고, 오중(吳中)의 명사들과 함께 산수 속에 은거하며 문학과 술을 즐기며 지냈다. 순치 연간에는 고염무(顧炎武), 귀장(歸莊) 등과 함께 경은시사(驚隱詩社)를 조직하여 비밀리에 반청 활동도 벌였다.

말년에는 가난과 병에 시달렸지만,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오정현지(烏程縣志)》에서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그는 가난하게 살며 점을 쳐 생계를 이어갔다. 경서와 사서를 깊이 연구하고, 잡록과 야사에도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시문을 좋아하여 고사를 자유자재로 인용하며 마치 손바닥 보듯 능숙하였고, 세상을 향한 울분과 불만이 글 속에 배어 있었다. 종종 글을 통해 감정을 쏟아냈으며, 고향의 선비들과 향신들은 모두 그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그의 명성과 재능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고, 결국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수호후전(水滸後傳)》 외에도 진침(陳忱)은 《안탕시집(雁宕詩集)》, 《치세계악부(痴世界樂府)》, 《속입일사탄사(續廿一史彈詞)》 등 여러 저작을 남겼으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고 흩어져 사라졌다.

유존인(柳存仁)의 《런던에서 본 중국소설 서목제요(倫敦所見中國小說書目提要)》에 따르면, 《수호후전》의 초간본 권두에는 강희 3년 갑진년(1664)에 진심이 직접 쓴 ‘원서(原序)’가 한 편 실려 있다. 이를 바탕으로 볼 때, 이 소설은 그가 오십 세 된 해에 집필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소설은 100회 본 《수호전(水滸傳)》의 뒤를 이어 전개된 서사로, 기존 내용을 발전시켜 확장한 작품이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이렇다. 양산박 영웅들이 방랍(方腊)을 정벌한 후, 절반 이상이 전사하고, 생존한 이준(李俊), 완소칠(阮小七), 이응(李應) 등 32인은 사방으로 흩어져 대부분 은거하며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조정의 간신 채경(蔡京), 동관(童貫) 등이 이들을 용납하지 않자, 그들은 마침내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다시 산림에서 봉기한다. 이후 악질 지주를 벌하고, 소작농을 구제하며, 탐관오리를 징벌하고, 관군에 맞서 싸우며 다시금 양산박의 의로운 대의를 이어간다.

이때 금나라 군이 남침하고 중원이 함락되며, 휘종(徽宗)과 흠종(欽宗) 두 황제가 포로로 끌려가고, 거대한 세도가문들이 적에게 잇따라 투항하자, 의병 세력은 다시금 궐기하여 금나라에 맞서 싸운다. 그들은 매국노 채경, 고구(高俅) 등을 처단하고, 나라를 구하고 임금을 돕는 걸 사명으로 삼는다. 그러나 끝내 중원의 국세가 회복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깨닫는다. 국운을 되찾을 희망이 사라지자 부득이 바다로 들어가 금오도(金鰲島)에 왕국을 세운다. 그들은 이준을 국왕으로 추대하고, 한편으로는 송 고종의 임안(臨安) 천도를 지지한다. 전편은 “이 소설은 마지막에 이르러, 중원 안팎이 하나로 통합되고, 임금과 신하가 함께 나라의 안정을 기뻐하며 축하하는 평화롭고 화합된 결말로 끝난다.

이 작품의 의도에 대해, 작자는 만력 연간에 쓴 것으로 보이는 《수호후전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고송유민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 궁핍하고 우울하며, 온통 불만에 가득 차 있으나 이를 술로도 달랠 수 없었기에, 이 남은 이야기를 빌려 이를 책으로 엮어낸 것이다.” 또한 《수호후전론략(水滸後傳論略)》에서는 명확히 밝혀 말하기를, “‘후전(後傳)’은 울분을 토로하기 위한 책이다”라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이 소설은 명나라 유민의 마음을 담아 분노를 풀고자 쓴 글로, 당대인의 시대적 감정과 내면 상태가 깊이 투영되어 있었다.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첫째는, 망국에 대한 그리움과 충신의 비통함을 표현한 점이다. 작가는 비통한 감정을 담아, 금나라 침입 이후 온 들판이 황폐해지고 백성들이 고통받는 참담한 상황을 묘사했다. 특히 채진(柴進)과 연청(燕青)이 오산(吳山)에 말을 세우고 항주의 아름다운 산하를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탄식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이토록 화려한 강산이 이제는 동남쪽 절반만 남아 있다니 참으로 안타깝다! 고향은 어딘가 조상의 무덤은 아득한 안개 너머에 있구나. 지금 생각해 보니 조씨 집안의 황실은 채씨 가문의 자손들만도 못하구나. 이 모든 게 허망하니, 이 순간 한숨만 더할 뿐이네!”

이러한 탄식은 굴원(屈原)과 같은 애국적 열정과 결합하여, 더욱 깊은 슬픔을 자아내고 비장함이 독자의 마음을 움직인다. 작가는 《수호후전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중원이 침몰하고, 영웅들이 해외로 흩어졌으니, 이것이 바로 《이소(離騷)》에 담긴 비애와 같다.” 이 말은, 조국이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본 한 애국 지식인이 느낀 원망과 슬픔을 표현한 것으로, 당시 시대정신을 강하게 드러낸다. 호적(胡適)은 《수호속집양종서(水滸續集兩種序)》에서 이렇게 말했다.

“《수호후전(水滸後傳)》은 북송 멸망 당시 상황을 묘사하면서, 곳곳에서 작가의 나라 잃은 비통함을 토로하고 있다.” 이는 《수호전(水滸傳)》의 주제를 더욱 발전시키고 심화시킨 평가라 할 수 있다.

둘째는 간신을 꾸짖고, 영웅을 갈망한 점이다. 난세의 고통을 직접 겪은 작가들은 종종 분노의 화살을 간신과 아첨꾼에게 돌리고, 충신과 영웅에게 희망을 걸었다. 종백경(鍾伯敬)은 《충의수호전 비평 서문(批評忠義水滸傳序)》에서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아아, 세상에 이규(李逵), 오용(吳用) 같은 자가 없으니, 하적(哈赤- 여진의 추장)이 요동에서 날뛰는구나! 가을바람이 불 때마다 용맹한 장수를 생각하며 외마디 절규가 절로 나오는구나! 장량(張良), 한신(韓信), 악비(岳飛), 유광(劉曠) 같은 자들이 다섯이나 여섯만 있었다면, 어찌 요괴 같은 기운을 싹 쓸어내고 아침밥을 지어 먹을 수 있지 않았겠는가!” 진침(陳忱)이 강희 원년(1662)에 지은 《구가(九歌)》 제3편에도 “담장에 무릎 껴안고 길게 읊조리니, 들풀 속에도 참된 영웅은 있는 법”이라 읊은 구절이 있다. 이처럼 세상을 구할 영웅에 대한 열망은 《수호후전》에도 뚜렷이 반영되어 있다. 《수호후전 원서(水滸後傳原序)》에서는 송강(宋江)의 ‘거짓 인의(假仁假義)’에 대한 비판 뒤에 이렇게 쓰여 있다. “그 108명 모두가 흑선풍(黑旋風), 노제할(魯提轄), 무행자(武行者), 변명삼랑(拚命三郎) 같은 자들이었다면, 간신과 역적이 어찌 남아났겠으며, 중원이 어찌 무너졌겠으며, 두 황제가 어찌 적에게 끌려갔겠는가!” 작품은 이처럼 간신 채경(蔡京), 고구(高俅) 등이 나라를 망치고 백성을 괴롭혔다고 분노하며 규탄하는 동시에, 외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양산박 영웅들을 열렬히 찬양하고 있다. 예컨대, 이응(李應)은 간신 채경을 비판하며 이렇게 말한다. “만약 송공명(宋公明), 노준의(盧俊義) 두 분이 지금 살아 계셨다면, 지금 금나라 군이 국경을 침범하였을 때, 우리가 직접 나서 적을 막았다면 어찌 국토가 무너지고 조정이 폐허가 되었겠는가!” 또한 연청(燕青)이 적진에 잠입하여 포로가 된 송 휘종(徽宗)을 만나는 장면에서는 그 역시 깨달아 말한다. “세상의 유능한 인재는 결코 황제와 가까운 신하나 귀족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로구나.” 이처럼 간신을 비판하고 충신을 찬미하는 정서는, 난세를 살아가는 이들의 보편적인 감정이었다.

셋째는 ‘깨끗한 땅(乾淨土)’를 찾아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점이다. 소설은 31회부터 해외로 시선을 돌리며, 바다 너머 새로운 이상향을 묘사하기 시작한다. 이는 작가가 ‘다른 곳에서라도 새롭고 깨끗한 세상을 찾고자 하는’ 이상과 희망을 담은 것이었다. 원세석(袁世碩)은 《패변쇄기사칙(稗邊瑣記四則)》에서 이렇게 보았다. “당시 육지에서는 청나라에 맞선 저항이 점점 패하고 있었다. 강남 선비들이 바다 건너 섬나라에 희망을 걸었던 건 시대의 보편적인 심리였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순치 16년(1659)에 정성공(鄭成功)과 장황언(張煌言)은 실제로 바다를 건너 장강(長江)으로 진입하여 금릉(金陵)에서 연합하였다. 진침이 소설에서 바다로 향하는 이야기를 전개한 것도 이 같은 시대적 정황과 깊은 관련이 있다. 진침(陳忱)은 정성공(鄭成功)의 해상 활동에 감명을 받아 이를 노래한 《의두소령수경(擬杜少陵收京)》이라는 시를 지었다. 순치 18년(1661년), 정성공은 바다를 건너 대만을 회복하고 적감성(赤嵌城)에 주둔하였다. 그 이듬해 그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정경(鄭經)이 뒤를 이어 사업을 이어받아 복건 등지를 공격하기도 했다. 진침은 이 같은 정씨 부자의 해상 항전을 염두에 두고, 이준(李俊) 등이 섬을 개척하고 나라를 다시 세우는 이야기를 허구로 구성함으로써, 바다 위에서라도 청에 저항하고 명을 회복하고자 하는 이상을 담아냈다. 이 점은 분명 이상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다.

《수호전(水滸傳)》과 비교할 때, 《수호후전(水滸後傳)》은 예술적 측면에서도 몇 가지 진전을 보였다. 우선, 주요 인물들이 전편에서 형성된 성격을 유지하면서도, 일부는 그 성격이 발전되고 변화되었다. 예컨대, 이준(李俊)은 전편에서는 단지 수군의 한 우두머리에 불과했지만, 《후전》에서는 지략과 용기를 겸비하고 큰 뜻을 품은 의군의 지도자로 새롭게 그려졌다. 이응(李應), 완소칠(阮小七), 악화(樂和) 등의 인물도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한층 발전된 개성으로 묘사되었다. 작가는 《수호후전 논략(水滸後傳論略)》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후전》에는 《전전》보다 어려운 점이 있다. 《전전》은 빈 틀에 그림을 그리는 듯 자유롭게 덧붙이고 뺄 수 있었지만, 《후전》은 이미 짜인 악보에 맞춰 노래를 부르듯 높낮이 조절이 어렵다. 《전전》은 일류 인물을 그려 더욱 뛰어났지만, 《후전》은 중하위 인물들로 그 속마음을 표현하려 하니 더욱 고심이 컸다.” 또한 작품의 문장은 자연스럽고 우아하며, 인물들의 대사는 생동감 넘치고 인상적으로 그려졌다. 경물 묘사 또한 시적이며 회화적인 정취가 풍부하다. 작품은 감정 표현을 특히 중시하여 전체에 짙은 서정적 분위기를 드리우고 있다. 예를 들어 제9회의 태호(太湖)의 설경, 제10회 태산(泰山) 일출, 제24회 황감(黃柑)과 청과(靑果)를 바치는 장면, 제38회 서호(西湖) 달밤 등은 자연을 묘사하고, 사물을 빌려 감정을 드러내며, 애수와 비애의 정조가 곡진하게 녹아들어 있어 매우 운치 있다. 호적(胡適)은 《수호전 속집 양종서(水滸傳續集兩種序)》에서, 연청(燕青)이 휘종에게 황감과 청과를 바치는 대목을 평하며 다음과 같이 극찬했다. “이 긴 대목은 정말로 ‘슬픔과 아름다움(哀艷)’이라는 말에 꼭 들어맞는 글이다. 예로부터 수많은 역사소설이 있었지만, 이처럼 뛰어난 글은 드물다. 망국의 비통함을 이만큼 절절하게 표현한 글도 드물고, 황제의 몰락을 이처럼 잘 그린 글도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이 소설에도 아쉬운 점은 있다. 이야기의 말미에 이르러 ‘금란전(金銮殿)에서 네 미녀가 인연을 맺고’, 군신이 함께 ‘시를 읊으며 대단원을 맺는’ 결말은 재자가인(才子佳人) 소설의 상투적인 틀에 빠져버린 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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