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당삼장성교서>로 왕희지 해서 연습

들어가며

지난 주부터 서예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해서(楷書)가 아닌 행서(行書)를 배우려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제게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로 시작하라고 추천해주셨습니다.

저는 처음 듣는 책 제목이었습니다. 대당삼장이라는 말은 서유기의 배경이 된 삼장법사를 의미하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퍼플렉시티에게 물어봤습니다. 다음은 퍼플렉시티의 설명입니다.

대당삼장성교서
제가 서예를 배우면서 직접 왕 희지 해서체로 써 본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입니다.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는 중국(中國) 당나라(唐나라) 시대의 대표적인 서예(書藝) 작품이자, 불교(佛敎)와 서예사(書藝史)에서 모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비문(碑文)이다.

이 작품은 집자성교서(集字聖敎序)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는 당나라(唐) 고승(高僧) 회인(懷仁)이 25년에 걸쳐 서예의 대가(大家) 왕희지(王羲之)의 다양한 작품에서 글자들을 하나하나 골라내어, 672년(唐 高宗 시기)에 완성한 집자비(集字碑)이다. 즉,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모아 새롭게 구성한 작품이다.

비문(碑文)의 본문(本文)은 당나라(唐)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이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奘)의 불교(佛敎) 경전(經典) 번역과 업적(業績)을 기리기 위해 직접 쓴 서문(序文)이다.

이 서문에는 불교(佛敎)의 진리(眞理)를 널리 알리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이 작품은 왕희지(王羲之)의 행서체(行書體)를 집대성(集大成)한 교본(敎本)으로, 이후 동아시아(東亞細亞) 서예(書藝)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왕희지(王羲之)의 서체(書體)를 배우려는 이들에게 필수적인 자료(資料)로 여겨진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도 이 비문(碑文)의 글씨를 모방하거나 필사(筆寫)한 예가 많으며, 대표적으로 조선(朝鮮)의 명필(名筆)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가 금니(金泥)로 옮겨 쓴 작품이 국립중앙박물관(國立中央博物館) 등에 소장(所藏)되어 있다.요약하면,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는 당나라(唐) 회인(懷仁) 스님이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로 엮은 비문(碑文)으로, 당 태종(唐 太宗)이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奘)의 업적(業績)을 기려 쓴 서문(序文)을 담고 있다. 왕희지(王羲之)의 행서체(行書體)를 집대성(集大成)한 대표적 교본(敎本)이자, 동아시아(東亞細亞) 서예사(書藝史)와 불교사(佛敎史)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집자성교서(集字聖敎序)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으며, 한국(韓國)에서도 널리 필사(筆寫)되고 연구(硏究)되었다.


원문

大唐三藏聖教序
太宗文皇帝制
弘福寺沙門懷仁集晉右將軍王羲之書
蓋聞二儀有像,顯覆載以含生;四時無形,潛寒暑以化物。是以窺天鑑地,庸愚皆識其端;明陰洞陽,賢哲罕窮其數。然而,天地苞乎陰陽而易識者,以其有像也。陰陽處乎天地而難窮者,以其無形也。故知像顯可徵,雖愚不惑;形潛莫睹,在智猶迷。況乎佛道崇虛,乘幽控寂,弘濟萬品,典御十方,舉威靈而無上,抑神力而無下;大之則彌於宇宙;細之則攝於毫釐;無滅無生,歷千劫而不古;若隱若顯,運百福而長今。妙道凝玄,遵之莫知其際;法流湛寂,挹之莫測其源。故知蠢蠢凡愚,區區庸鄙,投其旨趣,能無疑惑者哉?
然則,大教之興,基乎西土,騰漢庭而皎夢,照東域而流慈;昔者分形分跡之時,言未馳而成化;當常現常之世,民仰德而知遵。及乎晦影歸真,遷儀越世,金容掩色,不鏡三千之光;麗象開圖,空端四八之相。於是微言廣被,拯含類於三途。遺訓遐宣,導羣生於十地。然而,真教難仰,莫能一其旨歸。曲學易遵,邪正於焉紛糺?所以空有之論,或習俗而是非;大小之乘,乍沿時而隆替。
有玄奘法師者,法門之領袖也。幼懷貞敏,早悟三空之心;長契神情,先苞四忍之行。松風水月,未足比其清華;仙露明珠,詎能方其朗潤。故以智通無累,神測未形。超六塵而迥出,只千古而無對。凝心內境,悲正法之陵遲。棲慮玄門,慨深文之訛謬。思欲分條析理,廣彼前聞,截僞續真,開茲後學。是以翹心淨土,往遊西域,乘危遠邁,杖策孤征。積雪晨飛,途間失地,驚砂夕起,空外迷天。萬里山川,撥煙霞而進影;百重寒暑,躡霜雨而前蹤。誠重勞輕,求深願達,周遊西宇,十有七年。窮歷道邦,詢求正教。雙林八水,味道餐風;鹿苑鷲峯,瞻奇仰異。承至言於先聖,受真教於上賢。探賾妙門,精窮奧業。一乘五津之道,馳驟於心田;八藏三篋之文,波濤於口海。爰自所歷之國,總將三藏要文,凡六百五十七部,譯布中夏。宣揚勝業,引慈雲於西極,注法雨於東垂。聖教缺而復全;蒼生罪而還福。溼火宅之幹焰,共拔迷途;朗愛水之昏波,同臻彼岸。
是知惡因業墜,善以緣升。升墜之端,惟人所託。譬夫桂生高嶺,雲露方得泫其花;蓮出淥波,飛塵不能污其葉。非蓮性自潔而桂質本貞,良由所附者高,則微物不能累;所憑者淨,則濁類不能沾。夫以卉木無知,猶資善而成善,況乎人倫有識,不緣慶而求慶?方冀茲經流施,將日月而無窮;斯福遐敷,與乾坤而永大。
朕才謝珪璋,言慚博達。至於內典,尤所未閒。昨制序文,深爲鄙拙,唯恐穢翰墨於金簡,標瓦礫於珠林。 忽得來書,謬承褒讚。循躬省慮。彌益厚顏。善不足稱,空勞致謝。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教序)

태종문황제(太宗文皇帝) 지음

홍복사사문(弘福寺沙門) 회인(懷仁)이 진(晉) 우장군(右將軍)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모아 씀

대개 들으니, 하늘과 땅, 즉 이의(二儀)는 형상을 지니고 있어 드러난 모습으로 만물을 품어 기르며, 사시(四時)는 형상이 없어 숨어서 추위와 더위를 바꾸어 만물을 변화시킨다고 한다. 하늘을 살피고 땅을 비추어 봄에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그 이치를 조금은 아는 것이고, 음(陰)을 밝히고 양(陽)을 꿰뚫어 보려 함은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그 수를 다 알기 어렵다. 이는 하늘과 땅은 음양을 품고 있어 형상으로 드러나므로 쉽게 인식되지만, 음양은 하늘과 땅에 깃들어 형상이 없으므로 끝을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형상을 통해 증거할 수 있는 것은 어리석은 이도 쉽게 받아들이지만, 형상이 숨어 있어 보이지 않는 것은 지혜로운 이조차 미혹되는 것이다.

하물며 불도(佛道)는 공(空)을 숭상하고, 고요함 속에서 현묘함을 따르며, 만물을 널리 제도하고, 온 세상을 다스리는 도이다. 그 위엄과 신령은 높아 아무것도 그보다 위에 있지 않고, 신묘한 힘은 깊어 무엇도 그보다 낮지 않다. 크기로는 온 우주를 덮고, 작기로는 터럭 끝보다도 더 미세하다.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천겁을 지나도 오래되지 않고, 드러났다 숨었다 하며, 수많은 복덕을 돌려 항상 현재에 머무른다. 그 오묘한 도는 현묘하게 맺혀 있어, 따라가도 그 끝을 알 수 없고, 법의 흐름은 깊고 고요하여, 길어도 그 근원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범속한 중생이나 보통의 어리석은 이들이 이 도의 뜻을 따르고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렵다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큰 가르침(불교)은 서방 땅에서 일어나 한(漢) 왕조에 그 빛을 드러내었고, 동쪽 나라에 자비를 펼쳤다. 예전에는 몸과 자취를 드러내지도 않았으나 말이 미처 전해지기도 전에 이미 감화가 이루어졌고, 항상 세상에 계시던 시절에는 백성들이 그 덕을 우러러보고 스스로 따랐다. 그러나 자취를 감추고 진리에 돌아가신 뒤, 형식이 사라지고 세대를 넘어감에 따라 금빛 몸은 그 모습을 감추어 삼천 대천세계를 비추지 못하고, 아름다운 형상은 그림으로 전해져 사십팔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이리하여 깊은 가르침은 널리 퍼져, 중생을 삼악도에서 건져냈고, 남기신 가르침은 멀리 전해져, 중생을 십지(十地)의 지혜에 이르게 하였다.

그러나 진실한 가르침은 받들기 어렵고, 그 뜻을 하나로 모으기 어렵다. 왜곡된 가르침은 따르기 쉬워, 바른 것과 그른 것이 섞여 뒤엉킨다. 그래서 공(空)과 유(有)에 대한 논의는 습속에 따라 시비가 엇갈리고, 대승과 소승은 시대를 따라 흥망을 달리하였다.

이 가운데 현장(玄奘) 법사는 불법의 지도자였다. 어린 시절부터 곧고 총명하여 일찍이 삼공(三空)의 이치를 깨달았고, 장성하여서는 신령스러운 경지에 들어가 사념(四忍)의 수행을 먼저 실천하였다. 바람 부는 소나무, 물 위에 비친 달빛도 그의 맑고 고결함에는 미치지 못하고, 선인의 이슬과 진주의 빛남도 그 밝고 윤택함과 견줄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의 지혜는 얽매임이 없고, 영묘한 감응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조차 헤아렸다. 육진(六塵)의 번뇌를 초월하여 옛사람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하였다. 마음을 내면에 집중하여 정법이 점점 쇠해짐을 안타까워하고, 생각을 현묘한 문에 머물러 글의 잘못된 해석을 한탄하였다. 그래서 가르침의 갈래를 나누고 이치를 밝히며, 앞서 전해진 것을 널리 펼쳐, 거짓을 끊고 진실을 이으며, 후학을 위한 길을 열고자 하였다.

이에 마음을 청정한 국토에 두고, 서역으로 나아가 위험을 무릅쓰고 홀로 먼 길을 떠났다. 새벽에는 눈이 쌓여 길을 잃고, 저녁에는 모래바람이 일어 하늘조차 알아보기 힘들었다. 만 리에 걸친 산천을 지나며 안개를 헤치고 나아갔고, 수많은 추위와 더위를 겪으며 바람과 비를 밟고 나아갔다. 고생은 중하였으나 그 뜻은 가벼웠고, 뜻은 깊고 지극하여 기어이 이루고자 하였다. 이리하여 서방 세계를 두루 돌며 무려 17년을 보냈고, 불법의 나라를 구석구석 살펴 바른 가르침을 구하였다. 쌍림(雙林)과 팔수(八水)에서는 도를 맛보며 바람을 양식 삼았고, 녹원(鹿苑)과 독수리 봉우리에서는 신묘한 자취를 우러러보았다. 옛 성인의 깊은 말씀을 듣고, 뛰어난 이의 바른 가르침을 받아, 오묘한 경지의 문을 열고, 깊은 수행의 업을 정밀히 연구하였다. 일승(一乘)의 다섯 나루를 마음속에 달리듯 익히고, 팔장(八藏) 삼협(三篋)의 문헌은 입에서 바다처럼 넘쳐흘렀다.

이에 그가 거쳐 온 나라들에서 삼장(三藏)의 요점을 모아 모두 657부를 중원(中夏)에 번역하여 펼쳤다. 뛰어난 업적을 널리 알리고, 서방의 자비로운 구름을 이끌어 동방에 법비를 뿌렸다. 끊어진 성스러운 가르침을 다시 온전하게 하고, 죄 많은 중생을 구하여 복을 되돌려 주었다. 불타는 불의 집에서 다 함께 미혹을 벗어나게 하고, 탁한 사랑의 물결을 맑게 밝혀 함께 피안에 이르게 하였다.

이로써 알 수 있듯, 악한 인연은 죄로 떨어지게 하고, 선한 인연은 공덕으로 오르게 한다. 오르고 떨어짐의 근원은 오직 사람의 선택에 달려 있다. 비유하자면 계수나무는 높은 산에서 자라야만 구름과 이슬이 꽃을 적실 수 있고, 연꽃은 맑은 연못에서 피어나야 티끌도 그 잎을 더럽히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는 연꽃이 본래 깨끗하고 계수나무가 본래 정결하기 때문이 아니라, 의지하는 바가 고귀하고 맑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각도 없는 풀과 나무조차 좋은 것을 의지하여 선을 이루는데, 하물며 사람은 이성과 지혜를 지녔으니, 어찌 복된 인연을 따르지 않겠는가? 바라는 것은 이 경전이 세상에 널리 퍼져 해와 달처럼 영원하고, 이 복이 멀리까지 퍼져 하늘과 땅처럼 끝없이 크기를 바란다.

짐은 옥과 같은 재능도 부족하고, 박학한 언변도 부끄럽다. 더욱이 불교 경전에 있어서는 더욱 생소하다. 지난번에 서문을 짓게 되었을 때는 스스로 어설픔을 느껴, 금과 같은 경전에 누를 끼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보배로운 숲에 돌조각을 끼워 넣는 것이 될까 두려워하였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편지를 받고 과분한 칭찬을 입게 되었으니, 몸을 돌아보며 생각할수록 더욱 부끄러움이 깊어졌다. 잘함은 드러낼 것도 못 되고, 공연히 감사의 말씀만 드릴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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