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담수록 권1] 12. 홍고낭(紅姑娘)

홍고낭

홍고낭(紅姑娘)

경성(京城)의 적루(敵樓)는 안팎으로 모두 쉰 곳이었는데, 그 규모는 높고 깊어 여우나 쥐가 자주 깃들었다. 내성(內城) 동북쪽 모퉁이에 있는 각루(角樓) 안에도 여우 한 마리가 있었는데, 여자로 변해 붉은 웃옷에 비취색 치마를 입고 나타났다. 나이는 대략 열여섯에서 열일곱 살쯤 되어 보였고, 그 아름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성을 지키는 병사들이 자주 그녀를 목격했다. 모두가 사람이 아님을 알았지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미혹되었다. 그녀가 붉은 옷을 입었기에 다들 ‘홍고낭(紅姑娘)’이라 불렀다.

때로는 경박한 젊은이들이 달 밝은 밤에 술김에 색욕이 일어나, 누각 아래로 가서 저질스러운 말로 유혹하곤 했다. 그러면 누각 위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그렇게 멋대로 굴지 마세요.”

그 후 집으로 돌아가면 머리가 깨질 듯 아프거나, 입술이 복숭아처럼 부어올라 견디기 힘들었다. 반드시 눈물로 용서를 빌고 잘못을 뉘우쳐야만 겨우 나아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녀를 두려워했고, 감히 희롱하는 이가 없었다.

보병 장교 혁색(赫色)은 예순이 넘은 인물이었다. 어느 날 밤, 성에 올라가 당직을 서며 외롭게 초소에 앉으니, 술이 그리워졌다. 삼경(三更, 자정 무렵)이 지났을 무렵, 문밖에서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급히 “누구냐?”고 물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문을 열고 내다보니, 곱고 아름다운 처녀가 한 명 서 있었다. 그녀의 옷이 오색찬란하여 눈이 부실 정도였다. 자세히 보니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 뒤에는 쌍환(雙鬟, 두 가닥으로 틀어 올린 머리 모양) 머리를 한 시녀 둘이 술 항아리를 받든 채 달빛 아래에 서 있었다.

혁색은 원래 담이 큰 사람이었다. 놀란 마음이 진정되자, 그는 곧 여우임을 깨달았다. 그는 어찌 이 깊은 밤에 높은 성에까지 오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여자가 대답했다.

“저는 홍(洪)씨 집 셋째예요. 어르신이 술이 그리운 줄 알고 집에서 빚은 술을 가져왔어요.”

혁색은 크게 기뻐하며 그녀를 방 안으로 들였다. 그리고 그녀가 가져온 술과 안주로 급히 손님을 대접했다. 술에 취한 그가 기분이 좋아져서 물었다.

“삼낭자, 바라는 게 있소?”

여자가 말했다.

“여우가 사람을 홀리는 이유는 모두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예요. 하지만 어르신은 가난하고 병이 있는 데다 연세도 많으신데, 제가 무엇을 바랄 수 있겠어요? 제가 가까이 다가온 까닭은 어르신께 큰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에요.”

혁색은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했다. 여자가 말했다.

“어르신께서 송정(松亭)에서 몸값을 치르고 아이를 산 일을 잊으셨나요?”

혁색은 크게 깨달아 한참을 감탄했다. 그리고 그녀를 의붓딸로 삼았다.

그 뒤로는 당번이 있는 날이면, 혁색은 갖은 방법으로 동료들을 흩어 놓고는 홀로 지팡이를 짚고 각루 아래로 간 다음 말했다.

“삼낭자에 전한다. 오늘은 내가 당직이다.”

밤이 되면 과연 여자가 나타났다. 시녀 두 명도 함께 술과 음식을 들고 들어왔다. 진귀한 음식들이 가득 펼쳐졌다. 혁색은 밤마다 그녀와 함께 음식을 즐겼다.

그는 무언가를 마음속에 바라기만 하면 미처 입 밖에 내기도 전에 여자가 이미 알아차리고 단박에 마련해주었다. 혁색이 옥고리를 선물로 주자 여자는 두 번 절하며 받더니 열 겹 궤짝에 감춰 보관했다. 여자와 말을 주고받다가 혁색은 스스로 돌아보았다. 백발의 노인이 살날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러자 여자가 말했다.

“슬퍼하지 마세요. 아버지께선 앞으로도 서른 해는 더 사실 수 있어요.”

그러고는 그에게 기를 다스리는 수련법을 전해주었다. 그가 시험해 보니 효험이 꽤 있었다.

여자는 특별히 기이한 면은 없었고, 다만 얼굴 꾸미기를 매우 좋아했다. 하룻밤에도 네다섯 번씩 화장을 고쳤다. 혁색의 둘째 아들이 장가를 들게 되었는데, 집에는 술잔과 접시가 모자라 시장에서 빌려 오려 했다. 그러자 여자가 말했다.

“그럴 것 없어요. 제가 아버지를 위해 빌려올게요.”

약속한 날이 되자, 과연 금은으로 된 그릇이 가득 방 안에 놓여 있었다. 어디서 온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가족들은 이상히 여겼지만, 혁색이 사실대로 말해주자 모두 기뻐했다. 혼례를 치르고 나자 그릇들이 전부 사라졌다. 혁색의 둘째 아들은 호군(護軍)이었는데, 여자의 미모를 전해 듣고는 몰래 성루로 올라가 그 아버지가 당직 중인 곳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혁색 홀로 중얼거리며 웃고, 혼자 술 마시고 있을 뿐이었다. 한 번은 술에 취한 혁색이 자랑하려고 옥 술잔을 숨겨 집에 돌아오자 사라졌다. 급전이 필요할 때면 여자가 거금을 내밀었다. 모두 주제은(朱提銀)이었다.

이러기를 십여 년이나 이어졌다. 어느 날 밤, 여자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슬프게 말했다.

“인연이 다했어요. 이제 영원히 이별이에요.”

혁색이 놀라 물었지만,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경(五更, 새벽 무렵)이 되어 여자는 흐느끼며 사라졌다. 혁색은 가슴이 아렸지만, 그녀가 왜 영원히 이별해야 하는 알수 없었다. 다음 날, 집금오(執金吾, 수도 치안을 담당하는 관직)가 혁색이 나이가 많다 하여 조정에 청을 올려, 그에게 물러나 쉬게 하였다. 그제야 혁색은 여자의 말뜻을 깨닫고 탄식했다.

그보다 앞서 혁색이 한창 젊었을 때, 그는 초병대(驍騎校)로서 갈단(葛爾丹)을 토벌하는 군에 참전했다가 승전 후 송정(松亭)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그는 동료들과 함께 검은 여우 한 마리를 잡았다. 동료들은 그 가죽을 벗기기 위해 죽이려 했지만, 여우는 혁색을 향해 애처롭게 울었다. 혁색은 마음이 움직여 금 두 냥을 주고 여우를 사서 풀어주었다. 그 일이 이미 삼십 년 전 일이었다. 뜻밖에도 그 일이 이렇게 보답받을 줄은 몰랐다. 훗날 혁색은 아흔이 넘도록 살았고, 병 없이 세상을 떠났다. 여우 또한 자취를 감추었고,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난암(蘭岩)이 말한다.

여우는 사람이 아닌 다른 종족이면서도, 은혜를 갚고 덕을 보답할 줄 알며, 절개를 지키고 조용히 살아가기를 택했다. 사람을 홀려 해를 끼치는 일조차 스스로 부끄럽게 여겼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키가 일곱 자나 되는 사람 몸을 가지고도, 어깨를 움츠리고 아첨하며 웃고, 남에게 빌붙어 구걸하면서도 전혀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그러면서도 바른길을 지키고 아첨하지 않는 사람은 무능하다 욕하고, 스스로 세상을 아는 똑똑한 인재라 여긴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아아, 한탄스러운 일이로다!


원문

1 京城敵樓,內外凡五十座,高大深遂,往往為狐鼠所棲。內城東北隅角樓內,有一狐,化而為女子,紅衫翠裙,年可十六七,艷麗絕倫。守城兵往往見之,咸知其非人,而罔不狂惑失志。以其衣紅,共以紅姑娘稱之。間有儇薄少年,或際良宵薄醉,一動色心,至樓下薄言往挑,即聞嬌音曰:「爾勿妄為也。」歸輒頭痛難忍,否則唇忽腫起如桃,必哀懇悔過,適乃已。以此群畏之,無敢戲言者。
2 步軍校赫色,年六十餘矣。一夕,上城值宿,獨坐鋪中,思酒不得。三更後,門外聞彈指聲,亟問不答,啟戶視之,則二八佳麗人也,五色並馳,不可殫形。詳而視之,奪人目睛,後隨二雙鬟婢,捧酒壺,立月下。校素有膽,驚定,即悟其為狐。詢其那得深夜來此高城?答曰:「兒洪氏,行三,知翁思酒,謹以家釀相貽。」校大喜,延之入室。即以其攜來之酒肴,借以款倉卒客。醉後興高,問:「三姐有所求乎?」女曰:「以狐媚惑人者,皆有求於人者也。翁一身貧病,且老,兒何求於翁?所以親近翁者,以翁有大恩於兒故也。」校茫然不解所謂。女曰:「翁乃忘松亭贖兒之事耶?」翁始大悟,嘆惋者久之,遂認為義女。
3 自是必當值宿,校必多方散其儕伍,獨扶筇至角樓下,告曰:「致語三姑娘,我今日上班矣。」至晚女果至,二婢隨進酒饌,珍美錯陳。校夜夜饜之。每心有所欲,未發,女已先知,無不咄嗟立辦。校嘗以玉環贈,女再拜以受,什襲藏之。校與語談時,自念皤然一翁,將旦夕犯霧露,泣數行下。女曰:「勿傷,兒視爹尚可三十年活也。」乃授校以導引之術,行之頗效。
4 女無他異處,惟喜面,一夜恆四五次。校少子方娶,苦無杯盤,將賃諸市。女曰:「是無庸,兒當為爹假之。」至期,果有金銀器物,雜然陳於房中,不測所自。家人怪之,校以實告,始各欣喜。事畢,已皆失去矣。校次子為護軍,聞女美,潛上城至值所,從窗隙竊窺,竟無所見,但翁一人自言自笑自飲而已。校酒後,偶匿其玉斝,歸家旋失。果有急需,女必周以巨金,則盡朱提也。如是者十餘年。  女一夕忽泫然慘泣曰:「緣已盡矣,從此永別。」校驚問之,不答。五更後,哽咽而去。校亦酸惻,然未知所云所以永別者。翌日,執金吾以校年老,請於朝,勒令休致,校乃嘆悟。
5 先是校當壯歲時,為驍騎校,從征葛爾丹,凱旋至松亭,同人捕得一黑狐,欲殺之以取其皮,狐向校哀鳴,校心動,以金二兩贖而縱之。事三十年矣,不意至是乃獲其報,後校年至九十餘,無疾而終,狐亦徙去,不知所之。
6 蘭岩曰:
7 狐以異類,猶知酬恩報德,貞靜自守,不甘以媚惑人。奈何世間以七尺之軀,脅肩諂笑,干求於人,恬不為怪,而及以守正不阿者為庸人,因自居為識時務之俊傑,比比是也。籲,可慨也哉!

원문 출처

https://ctext.org/wiki.pl?if=gb&chapter=939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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