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명청 교체기 시사소설의 대표작
이 시기의 시사소설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도올한평(梼杌閒評)》, 《철관도(鐵冠圖)》, 《초사통속연의(樵史通俗演義)》를 들 수 있다.
《도올한평(梼杌閒評)》
《도올한평(梼杌閒評)》은 전 50권 50회로 구성된 작품으로, 환관 위충현(魏忠賢)의 일생을 묘사하고 있다. 이 책의 방각본(坊刻本) 제목은 《명주연(明珠緣)》이라고 바뀌어 출판되기도 했다. 원래 저자는 밝히지 않았는데, 등지성(鄧之誠)의 《골동속기(骨董續記)》에서 인용한 목전손(繆荃孫)의 《우향이별초(藕香簃別鈔)》의 고증에 따르면, 명말의 역사학자 이청(李淸)이 지은 것으로 추정하며, 구양건(歐陽健)은 이 견해를 더욱 확실히 인정했다. 이청의 자(字)는 영벽(映碧), 다른 자는 심수(心水), 만년의 호는 천일거사(天一居士)이다. 그는 명 만력(萬曆) 30년(1602)에 태어나 청 강희(康熙) 22년(1683)에 사망한 강소(江蘇) 흥화(興化) 출신이다. 숭정(崇禎) 4년(1631)에 진사가 되어 숭정과 홍광(弘光) 두 왕조에 걸쳐 벼슬을 했으며, 대리시승(大理寺丞)에 이르렀다.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은거하며 글을 지었다. 그의 저서로는 《삼원주소(三垣奏疏)》, 《삼원필기(三垣筆記)》, 《남도로(南渡錄)》, 《남북사합주(南北史合注)》, 《여세설(女世說)》 등이 있다.
《도올한평(梼杌閒評)》의 정확한 저술 시기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책에서는 명나라를 ‘본조(本朝)’라 칭하고 있으나, 마지막 회의 제목에는 “명나라 회종(懷宗)이 충신을 기리고 악당을 처단하다”는 구절이 있다. ‘회종’은 숭정 황제 주유검(朱由檢)이 사망한 뒤, 북경(北京)의 사대부들이 그를 기려 붙인 시호(諡號)다. 이를 보면 이 책은 숭정 17년(1644) 이후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책 제목인 ‘도올한(梼杌閒)’은 작품의 주제를 암시한다. 《신이경(神異經)》에 따르면 ‘도올(梼杌)’은 전설 속의 흉악한 짐승으로 ‘사람 얼굴에 호랑이 발을 하고 혼란을 일으키는 존재’로 묘사되어 있다. 후대에는 이를 악인에 비유하였다. 《사기(史記)·오제기(五帝紀)》에서도, “전욱씨(顓頊氏)에게 불초한 아들이 있었는데, 가르치기도 어렵고 말도 통하지 않아 천하 사람들이 ‘도올(梼杌)’이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는 이를 위충현에 비유한 것이다. 즉, 이 소설의 주제는 ‘악인의 평전’을 뜻하는 것이다. 황마서(黃摩西)의 《소설소화(小說小話)》에서도 이를 ‘위충현 외사(魏忠賢外史)’라 칭했다. 소설의 집필 목적은 환관 세력의 폐해를 폭로하는 데 있다. 책 머리의 《총론(總論)》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세상의 혼란과 백성의 고통은 한 가지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지만, 환관의 폐해보다 더 심한 것은 없다.” 또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명 태조(明太祖)가 천하를 통일한 뒤 전대의 잘못을 거울삼아 환관의 관직을 4품 이상 올리지 못하게 하고, 단지 청소나 명령 전달의 역할만 맡기고 글을 배우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후세로 오면서 점차 이러한 조상의 법을 어기고 환관을 지나치게 총애했다.……이후 천계(天啓) 연간에 이르러, 한낱 환관이 아무런 이유 없이 큰 죄악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작품의 의도는 《위충현소설척간서(魏忠賢小說斥奸書)》와 서로 통한다. 《척간서》의 서두에서도 오언고풍(五言古風)을 인용한 뒤의 주석에서 “환관이 총애를 받으면 반드시 권력을 멋대로 휘둘러 정치를 어지럽히고, 국가를 멸망시킨다”고 밝히고 있다.
소설은 주로 위충현(魏忠賢)의 일생과 행적을 묘사했다. 앞의 20회는 그가 궁에 들어가기 이전의 삶을, 뒤의 30회는 궁에 들어간 이후의 악행을 기록했다. 위충현은 본래 가난한 거리 예인의 사생아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방랑하며 남창(男娼)이 되기도 하고, 장사를 하기도 하며, 먹고 마시고 도박과 방탕을 일삼다가 결국 거지가 되었다. 35세에 궁에 들어가 문지기 환관이 된 이후로는 기회를 틈타 점차 출세를 꾀했다. 희종(熹宗)의 유모 객인월(客印月)과의 과거 친분을 이용하여 점차 궁궐 깊숙이 침투하였고, 특무조직인 동창과 서창을 장악하여 세력을 키웠다. 또한 자신의 당파를 널리 심어 이견을 가진 사람들을 배척하고 충신들을 모함하는 등, 온갖 악행을 일삼았다. 숭정제(崇禎帝)가 즉위한 이후 결국 탄핵을 받아 죄를 선고받고 목을 매 자살했다. 이 소설은 위충현의 일생을 중심으로 명나라 말기의 폭넓은 역사적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시장 예술가들의 고된 삶과 건달들의 교활함에서부터 궁정 환관들의 전횡과 당파 간의 권력투쟁까지 모두를 담고 있다. 이는 《경세음양몽(警世陰陽夢)》이나 《위충현소설척간서(魏忠賢小說斥奸書)》 등과 비교했을 때, 《도올한평》이 위충현의 전횡으로 인한 사회의 어두운 면을 더욱 생동감 있고 자세히 묘사한 점에서 탁월하다.
위충현의 행적을 묘사한 여러 소설 중에서 《도올한평》은 가장 늦게 나온 작품이면서 예술적 완성도 또한 가장 뛰어나다.
우선 이 작품은 역사적 사실과 허구의 관계를 매우 성공적으로 처리했다. 책에 묘사된 주요 줄거리인 위충현과 객씨(客氏)의 결탁, 권력 남용과 정치 혼란 등은 역사적으로 근거가 있다. 《명사(明史)·위충현전(魏忠賢傳)》에 따르면 “위충현은 만력(萬曆) 연간에 궁에 들어와 환관 손섬(孫暹) 아래에 속해 있었다. … 황태손의 유모 객씨는 이전부터 궁중에서 사사로이 총애를 받고 있었고, 이른바 ‘대식(對食, 궁녀와 환관 사이의 사적 관계)’ 관계였다. 위충현이 궁에 들어온 뒤 객씨와 다시 사통했고, 객씨는 황태손을 멀리하며 위충현을 사랑하여 두 사람은 깊은 관계를 맺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작품 속 「명주연(明珠緣)」의 이야기는 완전한 허구이다. 소설에서는 두 사람이 출세하기 전, ‘명주(明珠)’를 가지고 혼약을 맺고 몰래 사통하였다고 묘사했다. 이러한 묘사는 두 사람이 궁에 들어가 정치적으로 결탁하게 되는 데에 감정적 기반을 마련해 주는 동시에, 사회 각층의 다양한 세태와 풍속을 보여줌으로써 작품에 강한 인간미와 예술적 감동을 더해 주었다.
다음으로는 인물을 그리는 방식이 더 발전하고 새로워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위충현(魏忠賢)은 만력·숭정 연간의 말기 명나라 정치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역사적 인물이었다. 그의 생애를 본격적으로 소재로 삼은 최초의 소설인 《경세음양몽(警世陰陽夢)》에서는, 그의 간사하고 탐욕스러운 본질이 강조되어 있으며, 동시에 미천한 신분이었을 때의 약삭빠르고 영리한 성격도 함께 묘사되어 있다. 그 뒤를 이은 《위충현소설척간서(魏忠賢小說斥奸書)》, 《황명중흥성렬전(皇明中興聖烈傳)》 등에서는 묘사가 비교적 사실적이긴 하나, 《음양몽》만큼의 생동감은 미치지 못했다.
이에 비해 《도올한평》은 위충현의 인물 형상을 가장 성공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에 실린 위충현의 인물 초상화 아래의 ‘찬어(贊語)’에는 그를 “모든 악인 중의 우두머리, 온갖 악행의 괴수”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작자는 단지 위충현을 전형적인 악인으로만 단순화하지 않았다. 이 소설은 그의 간악하고 잔인한 악질적인 성격을 두드러지게 묘사하는 동시에, 그가 출세하기 전에는 가족을 소중히 여기고 의리를 중시하며, 은혜를 잊지 않고 반드시 보답하는 면모도 사실감 있게 그려냈다. 예컨대 부여옥(傅如玉)과의 결혼 서사, 이영정(李永貞)과의 의형제 맺음에 관한 묘사는 위충현의 입체적 성격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와 같이, 위충현의 형상은 전형적인 악역 예술의 대표라 할 만하다.
이 밖에도, 작품의 문장은 우아하면서도 유려하고, 변화가 풍부하다. 전반부에서 시장과 거리의 생활을 그린 부분은 이야기가 다소 복잡하게 전개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잘 짜여 있고, 등장인물들도 섬세하고 생동감 있게 그려졌다. 인물 간의 대화는 자연스럽고 상황에 잘 어울린다. 예컨대 위충현의 속된 말투, 객인월(客印月)의 음험한 성정, 후추홍(侯秋鴻)의 날카로운 말솜씨 등은 각기 뚜렷한 개성을 지니고 묘사되었다.
청말의 작가 천륙생(天僇生)은 자신의 저서 《중국역대소설사론(中國歷代小說史論)》에서 《도올한평》을 《유림외사(儒林外史)》와 함께 언급하며, “사회의 부패, 혼란, 탐욕, 음모 등 다양한 현실상을 신랄하게 묘사한 점에서, 《금병매(金瓶梅)》가 음란을, 《홍루몽(紅樓夢)》이 사치를, 《유림외사》와 《도올한평》이 비열함을 그려낸 점은 모두 극도의 슬픔에서 비롯된 묘사이며, 피가 종이 밖으로 배어 나올 정도로 절절한 것이다. 그 뿌리는 사마천(司馬遷)의 열전(列傳)에서 비롯되었다”고 평했다. 이 평론은 다소 과장된 면이 없지 않지만, 《도올한평》의 예술적 특징과 장회소설(章回小說)사에서의 중요한 위치를 지적한 점에서는 타당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철관도(鐵冠圖)》
《철관도(鐵冠圖)》는 총 50회로 구성된 작품으로, 이자성(李自成)의 농민봉기를 직접적으로 소설화한 작품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방각본(坊刻本)에서는 제목을 《숭정참사(崇禎慘史)》로 바꾸어 간행하기도 했다. 현재 전해지는 판본으로는 8권본과 4권본의 두 가지가 있는데, 8권본은 ‘송자산인(松滋山人)’이 편찬하고 ‘용암자(龍岩子)’가 교열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권두에는 무명씨의 서문이 붙어 있다. 반면 4권본은 ‘남묘노농(南畝老農)’이 편찬했다고 되어 있으나, 이들 모두의 실제 이름은 확인되지 않는다. 정진탁(鄭振鐸)은 《중국소설제요(中國小說提要)》에서 “이 책의 저자는 누구인지 알 수 없으며, 창작 시기는 대체로 청 초기이며, 아마도 《신사기관(新史奇觀)》보다 조금 뒤일 것”이라 평했다.
이 소설은 《초창통속소설(剿闖通俗小說)》, 《신세홍훈(新世弘勳)》 등을 본보기로 삼고, 민간 야사와 필기류 자료를 종합하여 서술한 작품이다. 이자성의 봉기를 다룬 이야기 구성은 《신세홍훈》과 대체로 유사하며, 등장인물과 줄거리에서는 일부 수정을 가했다. 작품은 이자성의 농민 봉기가 일어난 전 과정을 비교적 상세하고 완결성 있게 그려냈다. 다만 작자는 봉건 지배계층의 시각에 입각하여 이자성의 봉기를 ‘살성(殺星)이 인간 세상에 내려와 재앙을 일으킨 것’으로 묘사하며, 이를 미신에 기대어 나쁜 징조나 재앙처럼 묘사하며 깎아내렸다. 작품의 서두에서는 이자성이 황제가 되기 위해 자기 부모를 독살한 뒤 한 무덤에 함께 매장함으로써 하늘의 명을 받들었다고 설정했다. 그는 장헌충(張獻忠)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후에는 온갖 간음, 방화, 살육을 저질러 악행을 일삼고, 최종적으로 청군과 오삼계(吳三桂)에게 패하여 나공산(羅公山)에서 전사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 소설은 시사소설로서 명나라 말기 정치 상황과 몰락 직전의 참상을 일정 부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명나라가 멸망하기 전후의 북경(北京)이 겪은 참담한 풍경, 이자성의 봉기가 기획되고 실행되어 결국 완전히 실패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려내어, 일정한 역사적 인식의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인물 형상은 그리 뚜렷하지 않지만, 구성은 비교적 치밀하고, 이야기의 앞뒤가 잘 연결되어 있어 서사 구조는 명확하다. 특히 역사 속 실존 인물에 덧붙여 창작된 연법(閻法), 연여옥(閻如玉) 부자가 이야기에 간헐적으로 등장하며 전체 줄거리 속에 삽입되어 예술적 효과를 높이고 있다. 정진탁은 이 작품을 “근대의 이른바 ‘역사소설’에 더 가까운 형태”라고 평했다.
《초사통속연의(樵史通俗演義)》
《초사통속연의(樵史通俗演義)》는 전 8권 40회로 구성되어 있으며, 명말 정치 상황을 가장 포괄적으로 반영한 시사소설로 평가된다. 저자는 ‘강좌초자(江左樵子)’로 표기되어 있으며, 비평은 ‘전강요생(錢江拗生)’이 맡았고, 권두에는 ‘화조초자(花朝樵子)’의 자서가 실려 있다. 일부에서는 이 ‘초자(樵子)’를 육응장(陸應場)이라 추정하며, 자는 백생(伯生), 송강부(松江府) 청포현(青浦縣) 출신이라 하나, 확정되지는 않았다. 자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초자는 글을 좀 아는 사람으로, 한가한 틈을 타서 《송천로필(頌天胪筆)》, 《작중지략(酌中志略)》, 《구영기략(寇營紀略)》, 《갑신기사(甲申紀事)》 등의 책을 읽으며 세월을 보냈다. 때로는 조용히 슬퍼하고, 때로는 애통해하며, 때로는 의분에 치받치고, 때로는 아쉬움에 젖어, 결국 기쁨과 즐거움을 모두 잃게 되었다. 오래도록 그러다 보니, 마침내 이 초사(樵史)를 야사로 완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자술을 보면, 저자는 명나라의 유민으로 보이며, 옛 조국에 대한 깊은 그리움과 상실의 비통함을 안고 이 책을 썼음을 알 수 있다. 맹삼(孟森)은 《중인초사통속연의서(重印樵史通俗演義序)》에서, 저자가 “동림당(東林黨)의 계열에 속하며 복사(復社)와 밀접한 정신적 유대를 가진 인물이고, 오중(吳中) 출신으로 명말의 조정에서 오랫동안 벼슬했던 사람일 것이다. 이 책의 집필 시기는 청조에 들어선 직후이며, 새로운 왕조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비판을 삼갔으나, 위충현(魏忠賢), 마응려(馬應馁) 등에게는 뼛속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다”고 보았다. 또 그는 비평자 ‘요생(拗生)’ 역시 저자와 동일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다. 작품 속 비평에는 《초창소설(剿闖小說)》과 《신세홍훈(新世弘勳)》 등의 책이 언급되며, 후자인 《신세홍훈》에는 순치(順治) 8년의 경운루(慶雲樓) 간본이 있으므로, 《초사통속연의》는 순치 8년 이후에 집필된 것으로 보인다.
이 소설의 내용은 부분적으로는 실록에서, 또 일부는 저자의 직접적인 체험에서 얻은 것으로 보인다. 작품의 창작 목적은 명나라 멸망의 원인을 규명하려는 데에 있었다. 순치 간본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붙어 있다. “명나라가 쇠퇴한 건 위충현 일당의 난에서 비롯되었고, 무너진 것은 유민들의 난에서 비롯되었다. 두 가지 혼란이 겹치며 국운도 따라 스러졌다.” 이로써 저자의 집필 의도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작품에 서술된 역사적 사건은 태창(泰昌) 원년(1620)부터 시작하여, 홍광(弘光) 원년(1645)까지 이르며, 명말 천계(天啓), 숭정(崇禎), 홍광 세 기간의 정치적 주요 사건을 거의 모두 포괄하고 있다. 앞의 20회는 위충현과 객씨(客氏) 일당의 패악을 중점적으로 다루며, 요동(遼東) 전황도 일부 언급했다. 중간의 10회는 이자성의 봉기와 숭정제가 매산(煤山)에서 자결한 사건을 다뤘으며, 마지막 10회는 홍광 조정의 내부 분열, 청군의 남하, 그리고 남명 정권의 멸망 과정을 담고 있다. 작자는 이러한 역사적 묘사를 통해, 명말 조정 내 환관과 동림·복사 계파 간의 격렬한 당쟁, 명나라 지배층과 농민 봉기 세력 간의 계급 갈등, 나아가 명나라와 청나라 간의 민족적 충돌을 비교적 입체적으로 서술하며, 명조 붕괴의 여러 요인을 통합적으로 보여주었다.
난성(栾星)은 《초사통속연의교본서(樵史通俗演義校本序)》에서 이 작품에 대해 “필치가 폭넓고, 다양한 사건을 조합한 구성이 동시대 시사소설이나 희곡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수준”이라 평했다.
저자는 자신을 야사(野史)를 쓰는 사람이라 자처했으며, 책에 기록된 정치 사건들은 대부분 사실에 근거하여 직접적으로 서술한 것으로, 대체로 신뢰할 만하다. 또한 이 책은 역사 인물들에 대한 묘사도 함께 담고 있어 문헌으로서의 가치가 높다. 실제로 《명계북략(明季北略)》, 《명계남략(明季南略)》, 《평구지(平寇志)》, 《회릉유구시종록(懷陵流寇始終錄)》, 《남명야사(南明野史)》, 《소전기년(小腆紀年)》 등 여러 역사서들이 《초사(樵史)》의 내용을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많이 가져왔다. 또한 공상임(孔尚任)이 지은 전기(傳奇) 《도화선(桃花扇)》 권말의 ‘고증편’에도 《초사》에서 24개의 사료를 발췌했음을 명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 수록된 이자성(李自成) 관련 이야기는 상당 부분이 전해 들은 소문에 기반하고 있어, 저자의 자유로운 창작이 많이 섞여 있다. 예를 들어 이자성과 한씨(韓氏)의 결혼, 궁녀 두씨(竇氏)를 후궁으로 빼앗아 황후로 삼은 일, 음란한 생활 끝에 급사한 이야기 등은 모두 역사적 근거가 없는 내용이다.
문학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이 작품은 다수의 역사 문헌을 인용함으로써 문사(文史)가 뒤섞인 구조를 띠게 되었고, 그로 인해 예술적 완성도에는 일정한 제한을 주었다. 그러나 서사의 문체는 순전히 구어체로 쓰여 있어, 이야기 전개는 명료하고 때로는 생생하며 인상적인 대목들도 적지 않아 뚜렷한 문학적 개성을 지닌다. 손개제(孫楷第)는 《희곡소설서록해제(戲曲小說書錄解題)》에서 “이 책은 사건 서술이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복잡하지 않으며, 분량의 조절도 적절하여 강연용 역사소설로 손색이 없다. 각 회마다 덧붙은 시가 또한 슬픔과 감동을 자아내며 비통함을 머금은 노래 같아, 명말 시기 소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 평했다. 《초사통속연의》와 《도올한평》은 실로 시사소설 중에서도 예술적 성취가 가장 뛰어난 두 작품이다.
(4) 명청 교체기 시사소설의 사상과 예술적 특징
청 초기에 등장한 역사 연의체 소설들은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대부분 시사소설의 성격을 지녔으며, 작가들의 창작 의식과 작품의 사상·예술 양상은 모두 그 시대만의 뚜렷한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작가의 면면을 살펴보면, 시사소설의 저자들은 대체로 과거에 실패한 유생들이 많았다. 그들은 시국에 대한 관심과 일정한 사회적 책임감을 지니고 있었으며, 명나라가 멸망하기 전에는 정치가 바로 서고 사회가 안정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왕조가 교체되고 세상이 격변하면서, 그들은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받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나라의 멸망을 깊이 한탄한 이들도 있었는데, 예를 들어 《신사기관(新史奇觀)》의 저자는 “아아 통탄할 일이다! 예로부터 없던 참혹한 재앙이 우리 명나라에 들이닥쳤도다. 삼백 년 동안 흠결 없던 국운이 저 도적에게 무너졌도다. 실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며, 귀신도 울고 신령도 외치니, 억조(億兆)의 신민이 의지할 곳 없이 떠돌 뿐이다”라고 비탄했다.
또 어떤 이는 희망을 남명(南明)의 새 군주에게 걸기도 했다. 《이창소사(李闖小史)》의 저자는 “오늘날 상(商)나라의 제단을 다시 닦고, 한(漢)나라의 솥이 다시 빛내니, 반드시 지극한 정성으로 구한다면 새로운 창업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라며 기대를 드러냈다.
또 다른 이들은 무력감과 혼란 속에서 마음속 깊은 모순을 토로했다. 《오올한평》의 저자는 한편으로는 “세상을 어지럽히는 간신들을 억누르고, 올바른 도리를 높이며, 충성과 효를 지닌 사람들을 칭찬하고, 거짓으로 남을 해치는 말을 하는 자들은 참수하겠다”고 주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세상의 일은 마치 꽃잎 위의 이슬 같고, 인생은 바람 앞의 촛불 같다”고 탄식했다.
또 어떤 이들은 나라가 망하는 비극을 겪은 뒤에도 여전히 옛 조국에 대한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고, 무한한 슬픔 속에 잠겨 있었지만, 예전과 같은 정치적 열정은 사라지고 점차 마음이 평온해진 듯했다. 《초사통속연의(樵史通俗演義)》의 저자 강좌초자(江左樵子)는 그러한 심경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자서에서 산중에 은거하며 느낀 마음을 다음과 같이 썼다.
“초자는 날마다 산속에 거처하며, 날씨가 맑은지 비가 오는지를 헤아리고, 때때로 짐을 지고 노래를 부르며 다닌다. 맑은 날이면 옛 친구들이 찾아와 술을 나누며 위로하고, 비 오는 날이면 문을 닫고 조용히 빗자루를 잡으며 하늘을 우러러본다. 사람 사이의 따뜻함과 무정함, 인생에서 얻는 것과 잃는 것, 벼슬길의 성공과 실패 같은 일들은 초자가 감히 알 바가 아니다. 하물며 시대의 흥망성쇠를 어찌 감히 논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시사소설 작가들이 느낀 원망과 슬픔, 무력감과 황량함, 그리고 이러한 심정의 변화는 그들의 작품 곳곳에 깊이 새겨져 있다.
사상적 내용 면에서 보자면, 이들 작품은 강한 시대적 색채를 지니고 있으며, 이는 다음 몇 가지 측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첫째, 명나라 멸망의 교훈을 되새기고 역사에 대한 반성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신세홍훈(新世弘勳)》에서는 명조 정치의 잘못을 논하면서, 매우 상세하고 명쾌한 비판을 제시했다. 제14회와 제19회에서는 시랑(侍郞) 오정표(吳正表), 군사(君師) 송헌책(宋獻策), 천호(千戶) 패옥(貝玉) 등이 명나라 조정의 폐단에 대해 논의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과거 시험 제도를 지나치게 중시하고, 인사를 선발할 때 실제 능력보다는 경력과 절차만 따졌으며, 조정 내부에서는 당파가 갈라져 서로 다투고, 군대는 오히려 백성들을 약탈하였다. 이러한 여러 폐단이 겹쳐 결국 국가는 멸망하고 군주는 몰락하게 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이 같은 비판은 상당히 예리한 통찰을 담고 있어, 당시 인사들의 국정에 대한 반성을 잘 보여주며 매우 의미 있는 사상적 시도라 할 수 있다.
둘째는 청군의 잔혹 행위를 고발하고, 절개를 저버린 선비들을 풍자한 점이다. 예컨대 《칠봉유편(七峰遺編)》에서는 10여 회에 걸쳐 청군이 상숙(常熟)을 함락시킨 뒤 자행한 학살과 약탈의 만행을 상세히 묘사했으며,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수록하여 반청 감정을 격렬하게 표출했다.
만주 옷차림, 만주 머리
온 얼굴에 위세, 온 얼굴엔 수치
온 눈엔 오랑캐, 온 눈엔 눈물
가슴 가득 심사는 가득한 시름
滿洲服飾滿洲頭,
滿面威風滿面羞;
滿眼胡人滿眼淚,
滿腔心事滿腔愁.
이와 동시에, 작품은 변절하여 청에 투항한 자들을 강하게 비판하고 신랄하게 풍자했다. 《칠봉유편》 제3회에서는 ‘서강월(西江月)’이라는 사(詞)를 통해 명나라의 명문 출신이자 동림당 인사였던 전겸익(錢謙益)이 청에 투항한 일을 통렬히 비난했다.
과거에 세 번째로 급제하고
뛰어난 재주로 강남에서는 따르는 사람 줄지었지.
시서(詩書) 만 권 가슴에 가득했지.
걸출하여 동림당이 떠받들었지.
부귀 쫓는 마음 기어이 짙어졌네.
만년에 오명을 남기니 무슨 소용이랴!
科目探花及第,
才名江左人龍.
詩書萬卷貫心胸.
表表東林推重.
富貴興偏濃.
遺臭萬年何用!
또 어떤 작품은 항청 영웅들을 찬양하며 충신을 높이고 간신을 꾸짖는 방식으로 독자의 감정을 움직였다. 예컨대 《초사통속연의(樵史通俗演義)》에서는 명말 요동의 경략(經略)으로 활약한 웅정필(熊廷弼)을 “국가 대계를 갖춘, 수완 있는 명장”이라 평가하고, 그의 억울한 죽음에 “요동의 병사와 백성들이 통곡했으며, 부부와 자식까지 모두 상복을 입었다”고 기록했다.
셋째는 농민 봉기를 저주하고, 멸망한 옛 명나라에 대한 회한을 드러낸 점이다. 《초사통속연의》 제15회의 평어에서는 “명나라는 삼백 년간 천하를 통일하였으나, 이창(李闖)의 난으로 파괴되었다”고 하여 농민 반란에 대한 강한 적의를 드러냈다. 또한 무경씨(無競氏)의 《초창소설서(剿闖小說序)》에서도 농민 봉기를 “임금을 해친 원수, 하늘 아래 함께할 수 없는 죄악”이라 혹독히 비난했다. 이러한 시각은 곧 작품 전반에 투영되어, 사실을 왜곡하면서까지 이자성과 농민군을 추하게 묘사하고, 반대로 숭정제에게는 깊은 동정과 옛 명나라에 대한 무한한 향수를 드러내는 서사로 이어졌다. 《초사통속연의》에서는 “산천은 옛 모습이 아니로다”라는 감탄이 반복되는데, 이는 저자의 명조 멸망에 대한 슬픔과 분노를 강하게 표출한 구절이라 할 수 있다.
넷째는 동림당 인사를 칭송하고, 환관 세력의 전횡을 비판한 점이다. 《초사통속연의》는 동림(東林)의 선비들인 양련(楊漣), 좌광두(左光斗), 주순창(周順昌) 등이 보여준 강직하고 청렴한 품격을 깊은 감정을 담아 찬양했으며, 이들이 겪은 비극적 운명을 애도했다. 책에서는 양련을 “호광(湖廣)의 위대한 영웅이자, 참으로 성현에 가까운 인물”이라 평가하고, “백성들이 그를 신처럼 공경하고 사랑했다”고 묘사했다. 또한 《도올한평》 제35회에서는 천계 6년(1626) 소주(蘇州) 민란을 자세히 기록하며, 염패위(顏佩韋) 등 인물의 충절과 의리, 올곧은 기개를 높이 평가했다. 한편 이들 작품은 명말의 당쟁이 불러온 해악도 함께 비판하며 뚜렷한 정치적 입장을 드러냈다. 《초사통속연의》에서는 객씨(客氏)와 위충현(魏忠賢)의 결탁으로 정권이 장악된 사실을 강하게 지적하면서, 이들이 바로 명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주범이라 명시했다.
예술적 측면에서 보면, 시사소설 가운데에서도 《도올한평》과 《초사통속연의》처럼 비교적 완성도 높은 작품들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문학적 성취가 그리 높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이들 소설은 나름의 독특한 예술적 특성을 보였다. 그 구체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부 작품은 화본소설의 영향을 받아 역사적 서사를 평화(平話)와 장회소설(章回小說) 형식과 융합하여 서사 전개의 생동감을 꾀했다. 아영(阿英)은 《소설삼담(小說三談)》에서 《칠봉유편(七峰遺編)》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장편소설과 평화의 두 형식을 아울러 수용하여 구성되었다. 내용은 모두 사실에 근거하였으며, 다시금 역사 서술의 장점을 겸비하였다. 참으로 독창적 형식을 창조한 작품이라 할 만하다.”
둘째, 전체 구조와 서술 방식은 사전(史傳)의 체계를 모방한 경우가 많으며, 각각의 작품은 고유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칠봉유편》, 《초사통속연의(樵史通俗演義)》 등은 역사적 사실을 주된 줄기로 삼고, 인물과 사건을 씨줄로 엮어 전개함으로써 전체 서사 구조를 구성했다. 이는 일종의 편년체(編年體) 역사서 형식을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초사통속연의》 제1회의 시(詩)에서는 “붓을 들어 써보려니 정사(正史)가 부끄럽구나, 일단은 환란부터 편년으로 엮어보련다(提筆譜來慚信史, 且從禍入編年)”라고 하여, 역사서와 유사한 집필 방식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한편 어떤 작품은 조정에서 발표한 관보(邸報)를 짜깁기하고, 민간에서 떠도는 잡다한 소문과 골목 이야기들을 뒤섞어 구성했다. 이는 사전(史傳)의 잡기체(雜記體)에 가깝다. 예컨대 사국정(謝國楨)은 《증정만명사적고(增訂晚明史籍考)》에서 《괵창소사(馘闖小史)》을 두고 “명목상으로는 장회소설이지만, 실제로는 잡기체”라고 지적했다.
셋째, 서사 속에 논평을 자주 삽입했다. 이는 중국 전통 소설의 창작 목적이 권선징악에 있다는 인식과 연결된다. 역사연의체 소설은 종종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논평을 통해 작가의 교훈적 의도를 드러내곤 했다. 이를테면 《위충현소설척간서(魏忠賢小說斥奸書)》의 범례에서 쟁소주인(峥霄主人)은 “기록은 모두 순서를 따르며, 사건마다 논평이 따른다”고 밝혔다. 이처럼 논평은 대부분 이성적인 정치 평론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그 안에는 매우 흥미롭고 날카로운 견해들이 담겨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앞서 언급한 《신세홍훈(新世弘勳)》의 명나라 멸망 원인에 대한 평가 등이 그러하다.